눈 내리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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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저녁
  • 입력 : 2017. 12.21(목) 02:52
  • 문틈 시인

눈 내리는 저녁

집 안은 따뜻하다. 난방을 20도로 맞추어 놓았다. 거실 창에는 여기저기 김이 서려 있다. 창 밖에는 송이눈이 내린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송이들이 하늘 가득히 내리고 있다.

나는 구식 폴더폰으로 눈 내리는 정경을 촬영한다. 눈에 덮이는 숲과 길과 나무들이 한 장면이 되어 휴대폰의 스크린 안으로 끌려 들어온다. 마치 바깥 설경이 내 작은 휴대폰으로 순간 이동해온 느낌이다. 나는 갑자기 휴대폰에 들어온 설경을 누구한테라도 보여주고 싶어진다. 지금 눈이 온다고, 눈이 세상을 덮고 있다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로 다할 수 없다고.

휴대폰의 전화 번호 목록을 일별한다. 만일 내가 이 찰칵한 사진을 휴대폰 단추를 눌러 지인들 중 누군가에게 보낸다면 그걸 받은 지인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지나 않을까. 하지만 계절이 펼쳐 보인 이 아름다운 눈 내리는 저녁 풍경을 나 혼자 보고 있노라니 몹시 아까운 느낌이 든다.

나는 휴대폰이 낚아온 설경을 아무한테나 보내기로 한다. 그냥 전화번호를 나 혼자 무턱대고 조합해서 010 2333 ****를 눌러 설경을 보낸다. 실제로 그런 번호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다.

이 저녁 그는 이 세상 인류의 한 사람이다. ‘그 쪽에도 눈이 오나요?’ 라고 메시지 한 줄을 단 설경은 순식간에 누군가의 휴대폰으로 새처럼 날아간다.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이 이름 모를 사람으로부터 날아온 설경 사진을 보고 기뻐하길 바라면서.

그렇다. 눈 내리는 저녁 풍경은 기쁜 소식이다. 눈 내리는 저녁 풍경을 보면서 행복, 기쁨, 평안, 사랑, 축복, 고요, 용서…, 이런 섭씨 20도쯤 되는 낱말들이 내 가슴 안에 차오른다. 평소에 자연이란 것이 인간에 대해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눈 내리는 저녁 풍경만은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 호의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 같다.

따뜻이 덮어주는 손길에서 자연의 배려 같은 것을 느낀다. 그 가벼운 눈송이들이, 멀리서 온 소식 같은 반가운 언어들이, 겨울 저녁을 하얀 시트자락으로 덮어주는 듯하는 그런 모습이 눈물이 날 만큼 정겹다.

누구는 눈 온 날은 아이를 울리지도 말라고 했는데, 나는 눈 내리는 저녁 풍경을 보면서 모든 인류가 이 순간 정말 선의를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법정 스님이 내게 들려준 말이 있다. 사람들이 마음을 한데 모으면 맑은 하늘에서도 눈이 내리게 할 수 있다고. 지금 내리는 눈도 어느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모인 연유가 아닐까.

눈이 산과 들을 덮으면 거기 어디에 남과 북의 철조망이 있으며 나라들끼리 총을 겨누는 국경선이 있으랴. 눈이 내려 지상의 모든 국경선을 지우는 날은,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 어디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이 하나의 설촌(雪村)으로 연결된 대동세상의 세계시민이 되는 날이다.

새들이 몇 마리씩 풍경 속으로 날아간다. 둥지로 돌아가는 길일 터이다. 나는 시방 난방을 틀어놓고 바깥 풍경을 저만치 두고 보고 있지만 새들은 이렇게 눈 오는 저녁 어디 가서 잠을 잘까, 궁금하다.

어릴 적 뒤안의 대밭에서는 매우 추운 날 아침 새들이 얼어서 바닥에 떨어져 있기도 했다. 이 삭막한 도시에 어디 둥지를 틀만한 곳도 없거늘 새들이 살아가는 것은 참 용하기도 하다. 나는 새나 고라니 할 것 없이 그들에게 아무런 적의를 품고 있지 않으므로 기꺼이 내 집을 열어줄 수도 있는데 그 짐승, 새들은 추운 날 저녁에 평안히 쉴 곳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일까.

나는 보통 저녁 8시쯤에는 잠잘 채비를 한다. 새들이 둥지로 가는 시간에 나는 잠의 둥지로 들어갈 채비를 한다. 저녁 기도를 마치고 읽던 책도 덮어두고 방의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일찍 잠자리에 들기 때문에 되도록 저녁 약속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아마도 9시가 다 되어서야 잠에 드는 것 같다.

내게 잠자는 시간은 깨어 있는 시간만큼이나 중요하다. 나이가 들어가니 잠들기가 대략 난감이다. 그리고는 대체로 새벽 4시쯤에는 눈이 떠진다. 흡사 산문의 스님들 생활과 비슷하지 않을까싶다.

나는 거실로 나가 먼저 창으로 바깥을 내다본다. 간밤에 본 풍경이 그대로 있는지, 눈이 쌓였는지, 어떤 날은 하늘에 집으로 미처 돌아가지 못한 별들이 새별까지 남아 반짝일 때도 있다.

바깥이 간밤에 내린 눈으로 덮여 있으면 두툼한 털 점퍼를 걸치고 밖으로 나간다. 눈 나라로 가는 것이다. 등산화 바닥에서 눈이 밟히는 소리가 난다. 그대는 아는가. 신새벽 눈 내린 풍경 속으로 가서 고요한 세계의 하얀 침묵과 하나 되는 순간을. 이 순간 눈으로 하얗게 덮인 지구를 눈덩이처럼 굴리고 가는 그분에게도 영광이 있기를.

나는 여기에 쓴다. 눈이 내리는 저녁에는 누구든지 행복해야 한다. 당신이 누구이든, 개마고원, 시베리아, 아프리카 어디에 살든, 어디가 아프든, 삶이 고달프더라도, 눈 내린 저녁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라고.

문틈 시인 newstoktok@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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